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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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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뵐러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부상을 입고 훈장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동부 전선 등에서 참모장과 사령관을 역임했다. 1944년에는 데브레첸 전투에서의 공로로 백엽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국가 사회주의적 성향을 문제 삼아 상급 대장 진급을 거부하고 1945년 해임했다. 종전 후 아인자츠그루펜 활동 연루 혐의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1년 석방 후 고향에서 자치회 활동을 하다 197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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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뵐러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오토 뵐러는 1894년 니더작센주 부르크베델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직업 군인을 선택하여 1914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세 번 부상당하고 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서 연대 부관을 맡았다.[3] 1923년 중위, 1925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26년에는 참모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1932년 소령, 1935년 중령, 1938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베를린의 국방군 대학 참모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와 빌헬름 리스트 휘하에서 폴란드 침공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하였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에리히 폰 만슈타인 휘하 제11군 참모장을, 1942년 4월부터 귄터 폰 클루게 휘하 중앙군 집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1943년, 북부 집단군 소속 제1군단 사령관, 제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드네프르 강에서 루마니아까지 후퇴전을 지휘했으며, 야시-키시네우 공세에서 포위된 제8군 일부만 구출했다. 1944년 12월, 헝가리에서 남방군 집단 사령관에 임명, 데브레첸 전투 전공으로 백엽기사철십자장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뵐러의 능력을 인정했으나, 국가 사회주의자로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상급대장 진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뵐러는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예비역에 편입된 채 종전을 맞았다.

뵐러는 제11군 참모장 시절, 아인자츠그루페 D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와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살해된 유대인 시계 전부를 군에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국방군 장병에게 아인자츠그루펜 처형 활동 참여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다.

전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제11군 참모장 당시 아인자츠그루펜 활동 연루 혐의로 기소되었다. 뉘른베르크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아인자츠그루펜 협력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1월 석방되었다.

1949년 형량 검토 과정에서 형량은 변경 없이 확정되었고, 1945년으로 소급 적용되어 1951년 2월 모범적인 행실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고향 부르크베델에서 자치회 활동, 산림 보호 협회 회장, 지역 페스탈로치 재단 등 여러 재단 명예 총재를 역임했다. 두 번 결혼했으나, 외아들 게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견습 사관으로 1944년 핀란드만에서 전사했다. 뵐러는 고향에서 사망하여 아들 무덤 근처에 매장되었고, 사후 재산과 회고록은 재단에 기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오토 뵐러는 1894년 니더작센주 부르크베델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직업 군인을 선택하여 1914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제167 보병 연대에서 대대장을 맡았으며, 세 번의 부상으로 많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서 연대 부관을 맡았다.[3]

2. 2. 전간기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서 연대 부관을 맡았다. 1923년 중위, 1925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26년에는 참모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1932년 소령, 1935년 중령, 1938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베를린의 국방군 대학 참모가 되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뵐러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와 빌헬름 리스트 휘하에서 폴란드 침공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하였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에리히 폰 만슈타인 휘하의 제11군 참모장을, 1942년 4월부터는 귄터 폰 클루게 휘하의 중앙군 집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1943년 뵐러는 북부 집단군 소속 제1군단 사령관, 제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드네프르 강에서 루마니아까지 후퇴전을 지휘했으며, 야시-키시네우 공세에서는 포위된 제8군의 일부밖에 구출하지 못했다. 1944년 12월, 헝가리에서 남방군 집단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데브레첸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백엽기사철십자장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뵐러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국가 사회주의자로서는 낙제라고 판단하여 상급대장 진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뵐러는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예비역에 편입된 채 종전을 맞았다.

2. 3. 1. 아인자츠그루펜과의 관계 논란

뵐러는 제11군 참모장 시절, 아인자츠그루페 D의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와 긴밀히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살해된 유대인들의 시계 전부를 군에 넘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뵐러는 국방군 장병들에게 아인자츠그루펜의 처형 활동에 참여하거나 사진을 남기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전후 뵐러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제11군 참모장 당시 아인자츠그루펜 활동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의 협력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1년 1월에 석방되었다.

2. 4. 전후

연합군에 체포된 오토 뵐러는 제11군 참모장 시절의 죄상으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48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1월에 조기 석방되었다. 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활동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재판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기능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들의 행동을 돕는 데 공모한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반(反) 파르티잔 활동을 억제한다는 구실로 민간인 살해를 허용한 바르바로사 관할 명령을 시행하고, 노예 노동을 위한 민간인 추방과 아인자츠그루펜과의 협력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9년 형량 검토 과정에서 형량은 변경 없이 확정되었고, 형량이 1945년으로 소급 적용되어 1951년 2월에 모범적인 행실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뵐러는 고향 부르크베델에서 자치회 활동에 참여하며 산림 보호 협회 회장, 지역의 페스탈로치 재단 등 여러 재단의 명예 총재를 역임했다. 두 번 결혼했으나, 외아들 게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견습 사관으로 1944년 핀란드만에서 전사했다. 뵐러는 고향에서 사망하여 아들 무덤 근처에 매장되었고, 사후 재산과 회고록은 재단에 기증되었다.

3. 훈장


  • 1914년 Eisernes Kreuzde 2급(1914년) 및 1급(1916년)[1]
  • 1942년 1월 26일 Deutsches Kreuzde 금장, Heerde 대령 (AOK 11)[2]
  •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
  • * 1943년 8월 14일 Ritterkreuzde, 보병대장 및 제1군단 지휘관[3]
  • * 1944년 11월 28일 보병대장 및 제8군 지휘관으로 참나무 잎 수훈[3]

참조

[1] 서적 Thomas 1998
[2] 서적 Patzwall & Scherzer 2001
[3] 서적 Scherze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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